글 번호 : 31 작성자 : skybok

꽃 무 릇


꽃 무 릇

 

메주 고 제 웅

 

 

 

말복이 지나면 홀린 듯이 화단을 주시하는 버릇이 있다. 까치발을 했다가 머리를 숙이며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운다. 칠순을 쇤 몸이지만 아직 아가씨가 좋고 그립기 때문이다. 이 무슨 망령 난 소리인가! 늙은이가 오매불망 아가씨를 기다리며 목메는 짓이 온당한 일인가! 혹여 치매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온갖 병치레는 다 해도 뇌졸중이나 치매에 걸리면 안 될 일이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제자들에게 이보다 참혹한 일은 없다. 그리고 평생에 쌓은 수행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데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 어쩌자고 참죽 같은 다리맵시 고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늙은 중이 긴 속눈썹 깜박거리며 살며시 미소 짓는 그녀를 연모함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볼우물 살짝 파며 애교 떠는 그녀를 은애하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심사가 하도 엉뚱해 나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예끼 늙은 중놈아!” 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마음은 거꾸로 매달린 원숭인가? “늙었지만, 가슴은 새들이 노래하고 메아리가 푸르다네.” 라며 고목에 핀 매화를 떠올렸다.

 

 

백로가 지나며 벌레들이 동면할 자리를 준비하는 칩충질호(蟄蟲垤戶)가 한창이고, ‘물이 마르기 시작하는 수시학(水始涸) 현상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커트 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린 채로. 아아! 어쩌자고 이제야 오는가! ‘순아와의 이별이 한스러웠다. 이별이 다가왔을 때 나는 너무나 순진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별리가 되리라는 슬기로움이 없었다. 세상에 대해 숙맥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제라도 얘기해 오해를 풀어야겠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배움은 길이 막혀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입산이 최선이었다. 중노릇하며 익힌 것은 기껏해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뿐이었다. 그런 내가 무엇을 알았으랴.

 

삶의 길목에서 어느 찰나적인 순간 소나무 분재를 바라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얀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설산이 아닐런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순백의 세상에서 백치 아닌 백치가 되었다. 백치가 된 탓에 염불이나 화두를 위시해서 도()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가사 장삼은 개어놓고 바리때도 꼭꼭 싸매어 놓은 채로 방방곡곡 산천을 헤매며 공주(소나무 분재)를 모시러 다닌 적이 있었다. 공주님들은 기암절벽 양지바른 산 등에 궁전을 차리고 기품이 서린 삶을 누리고 있었다. 공주가 터 잡은 곳은 요새였다. 그 성스런 요새를 점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새를 점령하려면 등골에 홍수가 지고 감각이나 지각을 비롯해 인식이 둥둥 떠내려갔다. 지식도 재주도 능력도 큰 물살에 휩쓸러 갔다. 이럴 때 누가 나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대해 물었다면 공주와 함께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으리라. 당시에 내가 사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었기 때문에 이성적 사랑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 와중에 군 입대 영장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공주에게 미쳐 있었으므로 신데렐라에게 신기어 줄 유리 구두 한 짝이 필요했었다. 유리 구두는 분재에 필요한 지식, 기술, 채집, 이식 그리고 재배와 손질이었다. 더욱더 나은 유리 구두를 찾다가 보니 어느 결에 입대일이 코앞에 닥쳤다. 지금까지 악전고투한 일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애써서 수집하고 가꾸어 놓은 수많은 공주님은 어떻게 될까? 아버지와 형님은 믿을 수 없었다. ‘누가 몇 푼 쥐어주면 헐값에 나의 공주님들을 타인의 노예로 매매하고 마실 분들이다.’라는 생각에 고민을 하다가 너를 가까이 두고 가면 공주님들을 지킬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이 때문에 부랴부랴 정읍에서 상행선 열차를 타고 이리역에 내렸다. 너의 모친이 가르쳐준 약도를 따라 너의 집에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너의 마음이 그리는 수묵담채화를 읽었다. 너 역시 나를 읽었으리라. 그리움이 가득 담긴 가슴으로 조마조마하며 대문을 두들겼다. 너의 보리동생(아우)이 나왔었지!

 

 

언니는?”

 

몹시 아파요. 앓고 있는 모습 보이기 싫대요.”

 

 

나는 바보였다. “군에 입대합니다. 주소라도 알려주세요. 편지할 수 있도록!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을까? 그때의 어벙했던 행동이 회한으로 남아 여태껏 발목을 잡고 나를 괴롭힌다. 훈련을 마치고 27사단 포 사령부 관측반 유무선 병으로 배치되었다. 포상에서 보초를 서며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 /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라는 노래의 가사를 응얼거렸다. 병영생활을 한 지 일 년이 훨씬 지나서야 첫 휴가를 받았다. 휴가 때 너를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이사를 했다지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네가 알다시피 매우 구차했었지! 가난한 집 아들이었기에 상급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중학교 교과서를 포장한 뒤에 깨끗이 보고 나에게 건네주었지. 그 책으로 입산 전까지 국어, 영어, 수학, 역사, 과학 등을 공부했었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네가 책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나는 A, B, C도 몰랐을 것이고 머릿속이 깜깜해 작문은 고사하고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또 수필을 쓸 수 있었을까? 물론 군 생활 3년 동안 세계명작을 틈틈이 읽었던 것이 작문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네가 책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사고력을 키울 수 없었으리라. 너는 나에게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인 플라토닉 러브를 주고 간 사람이었다.

 

어느 때였던가! 그녀가 내게 왔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먼 별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꿈을 꾸고 난 후 그녀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부산에서 서울에 가고 서울에서 부산에 오려면 승용차, 버스, 기차, 비행기를 타면 내왕할 수 있다. 또한 지구촌 어디라도 배나 비행기를 타면 오갈 수 있다. 하지만 별나라에 가려면 인간이 개발한 기구를 타고는 갈 수가 없다. 별나라에 가는 특급 승차권은 콜레라, 결핵, 메르스 따위의 각종 병원균과 바이러스가 될 수 있으리라. 내가 병역의무를 위해 차에 오르고 있을 때 너는 별나라에 가려고 별나라 행 승차권을 단단히 쥐고 있었으리라.

 

그녀는 유난히 키가 컸다. 교복 치마 밑으로 보이는 다리의 맵시는 참죽이었다. 참죽의 늘씬한 걸음걸이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걸어가는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내 가슴속에 영원한 미완성의 수채화로 남아있다. 아아! 수채화 속의 그리움이여! 그리움이 저 먼 별에서 순수한 사랑을 잊지 못해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것이리라.

 

그리스인은 사랑을 네 가지로 표현한다는 얘기이다. 혈육 간의 사랑인 스트로게 러브(STOR GE love), 친구 간의 우정인 필리아(philia), 이성 간의 사랑인 에로스(eros),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인 아가페(agape)가 그들이다. 아가페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듯이 국가와 민족이나 인종을 비롯하여 빈부귀천이나 선악을 초월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설사 상대가 원수일지라도 끝없이 사랑하며 보살핀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지상에 아가페적인 사랑이 흐르고 있을까? 아니다. 세상은 아가페를 외치며 반인륜적 행위가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죄의식마저도 없이 전쟁을 일삼고 있다. 각 종교의 성소는 이미 소득을 위한 사업장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잔학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 앞에 참죽 다리맵시 어여쁜 아가씨가 환생했다. 곁에 와서 속눈썹을 깜박이고 있다. 얼굴에는 화사하게 볼우물을 한 채 살며시 미소 지으며 서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미녀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민망스럽기도 하다.

 

 

꽃무릇이 활짝 피었다!”

 

 

애틋한 사랑이 피었다.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러나 아가페적인 사랑이 넘쳐흐른다. 꽃무릇 꽃은 단 한 번도 잔학하거나 반인륜적 행위를 하거나 빈부귀천과 선악을 차별한 적이 없다. 오직 대자대비로 붉게 웃고 있을 뿐이다. 먼 별나라에 갔던 그녀가 꽃무릇 꽃으로 사랑을 한 아름 안고 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승의 고뇌를 뛰어넘어 그녀를 따라 사랑으로 세상을 덮고 싶다. 정신적인 사랑 아니 영혼의 사랑은 스킨십이 아니라 플라토닉 러브다. 오늘도 꽃무릇 꽃은 불그레한 매혹적인 안색과 오안(悟眼)의 자태로 속눈썹 깜박거리며 참죽같이 매끈한 다리맵시 나신으로 우리를 천상에 밀어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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